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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완전한 기술 아련한 느낌" 이후로, 나는 구형 렌즈의 특성을 좋아하게 되었다. '약간 남아있는 구면 수차와 보다 간단한 디자인에서 나오는 높은 콘트라스트에 의한 부드러운 묘사력'[각주:1]과 같은 독특한 매력에 빠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이코 디지털 렌즈 중에는 이 구형 렌즈의 특성을 가진 제품이 있다. ZD 25mm f/2.8과 ZD 35mm f/3.5정도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구성 렌즈의 매수가 적고, ED, HR, DSA와 같은 특수 렌즈가 들어가지 않았고[각주:2], 조리개를 개방했을 때 비교적 소프트하고 1과 1/3스탑 정도 조였을 때 높은 해상력이 나온다[각주:3]. 이들은 신기하게도 구형 렌즈의 특성을 가졌으면서 연식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고, AF가 가능하며, 중고 가격은 구형 렌즈에 근접한다.


 상상력을 뒤섞어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보자면 아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될 것이다.




 ZD 25mm f/2.8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 많은 포서드 유저들이 환호성을 터뜨렸고, Photoreview 같은 곳에서는 이 렌즈를 두고 "35mm렌즈보다 작고, 가볍고, 가성비 좋은 카메라와 렌즈를 만들겠다는 포서드의 처음 약속이 실현된 좋은 예"[각주:4]라는 식으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 귀여운 렌즈의 구성을 보면 "어디서 많이 보던 설계"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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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쪽은 테사 렌즈(3군 4매)의 구성이고, 아래쪽은 플라나 렌즈(6군 4매)의 구성이다. 이제 플라나의 대물부 쪽에서 렌즈를 한 장 지우고, 이오팬 그림 위에 올려놓아 보겠다. 사실 테사의 마운트부에 렌즈를 추가하는 쪽이 내 의도와 맞지만, 플라나에서 렌즈를 한 장 지우는 편이 그림이 더 잘 나와서 이렇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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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오팬이 "테사+1"의 변칙으로 설계되었다고 생각한다. 설명의 편의상 이미지를 하나 더 사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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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운트부 렌즈를 통과한 빛이 저렇게 꺾여 촬상면에 맺힌다면, 플랜지백이 길어질수록 마운트부 렌즈의 구경은 커질 수밖에 없다. 마운트부 렌즈의 구경이 커져야 한다면 렌즈 설계 전체가 바뀌어야 하며, 렌즈는 크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포서드의 플랜지백은 38.67mm로, 판형에 비해 상당히 긴 편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설계를 따른다면 포서드의 표준 렌즈[각주:5]는 크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각주:6]. 라이카에서 만든 포서드용 25mm f/1.4가 그 모양으로 크고 무거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각주:7].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장초점이었을 테사 렌즈의 마운트부에 볼록렌즈를 추가하여 초점거리를 짧게 만드는 변칙[각주:8]-즉 "테사+1"을 택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운트부 앞에 있는 더블 가우스 렌즈들은 자기네끼리 알아서 수차를 상쇄할 테니 마운트부의 렌즈만 비구면으로 깎으면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


 롤라이 35에 달린 테사 렌즈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그리고 렌즈 붙박이 RF중 f/2.8짜리 모델에 달린 작고 귀여운 렌즈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이오팬은 그다지 혁신적인 렌즈가 아니다. 포서드의 플랜지백이 32mm정도로 지금보다 짧았더라면, 그래서 "테사+1"이 아닌 테사의 축소판으로 설계할 수 있었더라면, 이오팬은 더 작고 싸게 나올 수도 있었다.


 이오팬은 포서드의 처음 약속이 실현된 예라기보다는, 30년쯤 뒷북을 친 주제에 크게나 무게를 제대로 줄이지도 못하고 가격도 좋지 않게 나온 폐물에 가까웠다. 만약 이 렌즈가 설계만 조금 키워서, APS-C전용 28mm f/2.8정도로 출시되었더라면 시원하게 망했을 것이다. 이오팬이 팔려나간 이유는 물건이 좋아서라기보다, 당시 포서드에서 AF 되는 표준 렌즈라곤 라이카 25mm f/1.4와 이오팬, 둘뿐이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라고 보는 편이 옳다.


 이오팬 같은 렌즈가 다시 나올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마이크로포서드 시장의 표준 렌즈는 이제 많고도 많으니까. 하지만 나는 바로 '다시 나올 가능성이 없는 렌즈'라는 이유로 이오팬을 좋아하게 되었다. 테사 비슷한 아주 간단하고 오래된 설계의 렌즈가 연식도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 이제 중고가격도 많이 내려왔으니까. AF가 되는 렌즈 중에 이런 물건을 찾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플라나와 조나를 잠깐 보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다. 아래와 같은 이미지가 돌아다닐 만큼, "플라나 설계"는 "조나 설계"와 비슷한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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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이스의 85mm f/2 조나와 85mm f/1.4 플라나의 렌즈 구성이다. 대물부, 그러니까 왼쪽부터 1-2-3-4-5-6이라는 숫자를 각 구성 렌즈에 붙인다면, 자이스의 85mm f/1.4 플라나는 마운트부의 4-5가 하나의 군으로 묶여 있고 조나는 4-5가 묶이지 않고 풀려 있다.




 ZD 35mm f/3.5렌즈는 이오팬이 나오기 전까지 포서드 단렌즈 중 가장 값이 쌌다. 그래서 꽤 많이 팔려나갔고, 그만큼 중고도 많이 굴러다닌다. 나는 6군 6매라는 이 렌즈의 구성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왠지 자이스 85mm f/2 조나 렌즈의 대물부와 마운트부를 뒤집으면 둘이 비슷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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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마의 대물부 렌즈 순서는 [볼록(1)-오목(2)-볼록(3)]으로, 뒤집어 끼운 조나의 [볼록(1')-볼록(2')-오목(3')] 순서와 다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렌즈의 곡면이 밀착된 부분이 없다는 점을 닮았고, 세 번째 렌즈가 오목(3')과 볼록(3)으로 성질은 다르지만 안쪽 곡면과 바깥쪽 곡면의 차이가 적어 밋밋하다는 점을 닮았고, 35마의 4-5-6의 배치와 형태는 뒤집어 끼운 조나의 4'-5'-6'을 무척 닮았다[각주:9].


 접사를 할 때는 뒤집어 끼워 쓸 수 있는 렌즈가 존재한다는데, 올림푸스 설계자들이 '그럼 아예 조나를 처음부터 뒤집어 만들면 어떨까!' 하면서 노리고 만들었다면[각주:10], 뒤집어 끼운 조나의 설계로 보는 편이 좀 더 타당하다. 오목과 볼록의 렌즈 순서가 바뀐 것은, 뒤집어 끼운 렌즈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무한대 거리의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


 35마는 포서드의 특성과 기존 광학의 원가절감법을 최대한 활용한 렌즈다. 초점거리를 플랜지백과 유사하게 맞추어 크기 부담을 줄이고, 더블 가우스 구조를 응용하여 특수렌즈를 쓰지 않으면서 수차를 억제하였다. 준망원 단렌즈로서는 너무 어둡다는 문제는 '접사 렌즈'의 면책 특권을 이용해 회피했고, 뒤집어 끼우는 방식의 설계를 응용하여 적은 매수의 구성으로도 접사 기능을 구현하였다.


 '후드 일체형 경통' 따위를 없애고 깜찍한 렌즈 알에 맞추어 렌즈 몸통도 깜찍하게 만들었다면 기념비적인 렌즈로 남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스펙에 비해 렌즈가 너무 비대하며, 특수렌즈 없이 구현한 성능은 1600만 화소의 마이크로 포서드 바디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오늘날의 35마는 (중고가격을 기준으로 한) 가격대 성능비 외에는 별다른 매력이 없다. 만약 스펙 향상 없이, 출시가격 인하 없이 마이크로포서드용으로 새로 나온다면 그대로 망할 것이다. 이오팬만큼이나 다시 나올 가능성이 0에 가까운 렌즈인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 끼운 조나 비슷한 설계에 특수렌즈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은 재미있다. 이런 재미있는 렌즈가 연식도 오래 되지 않았으면서 AF가 되고, 중고가격도 많이 내려왔다. 클래식 설계를 응용한 주이코 디지털 렌즈라는 점에서, 이오팬과 35마는 한 번 거들떠볼만큼 흥미롭고 특이한 렌즈라 할 수 있다.




 주석


  1. "비싼 카메라는 왜 비싼가" 중에서 [본문으로]
  2. 이오팬에 비구면이 한 장 있기는 하다. [본문으로]
  3. 35mm f/3.5는 조리개를 개방했을 때의 해상력도 괜찮은 편이지만 과연 이 판형에서 35mm에 f/3.5가 '개방'이라고 부를 만한 조리개 값인지는 생각해 봐야겠다. [본문으로]
  4. It's an excellent example of the original promise of the Four Thirds System to deliver cameras and lenses that are smaller, lighter and more cost-effective to manufacture than traditional 35mm lenses. [본문으로]
  5. 초점거리가 21.64mm 가량 되어야 한다. [본문으로]
  6. 포서드가 플랜지백을 길게 가져감으로써 주변부 화질에서 이득을 얻는 면도 있지만, 이 점은 여기서 논외로 하고, 렌즈의 크기만 따져보겠다. [본문으로]
  7. 시그마 삼식이가 크고 무거운 이유도 유사하다. [본문으로]
  8. 메타본즈 스피드 어댑터와 같은 기능을 마운트부에 있는 '+1' 렌즈가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9. 이는 뒤집어 끼운 플라나의 4'-5'-6'과도 유사하다. [본문으로]
  10. 뒤집어 끼우는 과정에서 끼어들 수 있는 다른 요소(초점을 맞추는 렌즈의 위치가 변한다든가, 플랜지백이 변하는 효과가 생긴다든가)가 그 렌즈를 접사에 적합하게 만들 수는 있겠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대칭 설계인 플라나와 그와 유사한 조나를 단순히 뒤집어 설계한다고 평범한 렌즈 설계가 갑자기 훌륭한 접사 렌즈 설계로 변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이게 가능했다면 너도나도 훌륭한 접사 렌즈를 만들었겠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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