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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갈 일이 생겼다. 그동안 필름의 특성(색감, 입자감, 계조, DR 등)에 별 신경을 쓰지 않다가 왠지 호기심이 생겨서, 일부러 여러 종류의 필름을 섞어서 구입해 보았다. 야외 촬영이 주가 될 것이고, 촬영한 필름을 한꺼번에 맡기면 어느 정도 비슷한 조건(동일한 작업자, 동일한 장비, 유사한 세팅)으로 스캔이 될 테니 필름의 특성을 비교해볼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여행에서 필름에 대한 기대를 많이 접어야 했다.




 프로포토 100과 프로이미지 100은 매우 화창한 날의 야외 촬영에서도 하늘과 바다의 푸른 빛을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했다. 2004년에 구입한 똑딱이는 사실상 동일한 촬영조건에서 그 푸른 빛을 제대로 살려냈는데도 말이다. 프로포토와 프로이미지는 코닥 필름의 누런 기운이 돈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만큼 색이 탁했다. 미묘한 색감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여행지 기념사진 용도로 쓰기에도 부족한 느낌이 든다.


 감도 100치고는 입자도 굵은 편이다. 3MP급 스캔에서도 100% 확대하면 입자가 보인다. 피부의 명부에서 암부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제법 거슬릴 만큼 입자가 튄다.




 엑타 100은 여행지 기념사진 용도로는 가격대비 신통하지 않았다. 버건디 정도의 옷이 형광에 가까운 빨강으로 나올 만큼 색감이 강하게 나오기 때문에 붉은색이나 주황색 계열의 옷을 입으면 사진에서 옷밖에 안 보인다. 바탕색이 차분하고 그 위에 패턴을 올린 옷은 괜찮다. 코닥 필름의 누런 기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알록달록하게 꽃이 핀 식물원에서 사진을 찍는 정도의 용도로는 만족할 만하지만, 이 정도로 용도가 제한된다면 돈값 못한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다만 입자 하나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고와서, 3MP급 스캔으로는 100% 확대해도 입자를 식별할 수 없다. 피부의 명부-암부 경계도 깔끔하다. 아주 마음에 든다. "필름의 해상력"에서 엑타 100이 디지털카메라의 약 5.6MP에 대응한다는 계산이 나왔었는데, 3MP급 스캔이라면 당연히 입자를 식별할 수 없어야 한다. 비교적 큰 인화 작업을 생각한다면 엑타 100은 6MP급 고해상도 스캔을 해도 되겠다.




 포트라 160은 전반적으로 양호한 결과를 내 주었다. 순광에서 하늘과 바다의 푸른 빛을 잘 살려 주었고 빛의 방향이 좋거나 좋지 않거나 사람의 피부를 부드럽게 잘 표현해 주었다. 사광에서의 하늘은 별로 푸르지 않고 역광에서의 하늘 재현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사광에서의 하늘은 노출을 조금 언더로 잡는 것으로 대처할 수는 있지만 역광에서의 하늘은 쉽게 잡아낼 수 없다. 코닥 필름의 누런 기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감도 100짜리 중저가형 필름인 프로포토 100이나 프로이미지 100보다 입자가 곱다. 피부의 명부-암부 경계도 깔끔하다. 3MP급 스캔에서는 피부의 암부등에서 입자를 식별할 수 있다. 포트라 160이 디지털카메라의 약 2.2MP에 대응한다는 계산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결과다. 좀 비싸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컷수가 많지 않은 여행용 기념사진을 찍을 필름으로는 그럭저럭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업체에 맡기는 필름스캔은 디지털카메라의 JPG 촬영보다는 나을 수도 있겠지만, RAW촬영+후보정의 조합을 당해내지는 못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필름카메라로 찍은 이번 여행지 기념사진에서 만족스러운 컷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 처음 예상했던 대로, 필름 북 한 권을 채울 때까지만 필름카메라를 주력으로 사용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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