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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사계심도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카메라는 그만한 표현의 자유를 추가로 얻는다. 피사계심도를 얼마나 얕게 할 수 있느냐(이른바 아웃포커싱이 얼마나 잘 되느냐)가 장비를 평가하는 척도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필름카메라는 꽤 저렴한 배경 지우개라고 부를 만하다. 50mm F/1.7 정도의 스펙을 가진 렌즈 붙박이 RF필카는 10만원 미만의 중고제품이 흔한 편이다. 캐논 GIII QL17도 그 중 하나다[각주:1]. 4롤에 만 원 하는 필름스캔을 받는다면[각주:2] 필름 가격을 포함하여[각주:3] 한 컷에 180원 정도 돈이 들어가는 셈이다. 천 컷에 18만원 꼴이다. 촬영 컷수가 적고 한 컷 한 컷을 비교적 검증된 방법으로(굳이 결과물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나올 지 예측 가능하게) 촬영하는 사람이라면, 값비싼 풀프레임 DSLR에 비해 초기투자비용도 적고 감가상각은 없다시피한 필름카메라가 상당히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닥판깡"이라는 명제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135보다 큰 포맷에 관심을 둘 수도 있다. 중형 카메라 말이다. 렌즈 붙박이 RF(내지는 이안투시형 AF) 중형 필름카메라는 생각보다 저렴하다. 손품을 판다면 후지 GA645는 40만 원 이하에, GW 690 III는 60만 원 이하에 중고샵에서 구할 수 있고 동호회 장터라면 이보다 낮은 가격에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가격은 좀 오른다. 3롤에 만 원 하는 필름스캔을 받는다면 필름 가격을 포함하여[각주:4] 645판이라면[각주:5] 한 컷에 580원, 69판이라면[각주:6] 한 컷에 1170원 정도 돈이 들어간다. 이 정도면 굳이 인화를 하지 않더라도 일년에 수백 컷 이상 찍을 때 부담이 될 만한 비용이 들어간다.


 그런데 과연 중형 필름카메라는 '저렴한 배경 지우개'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다음과 같은 가정 하에 "사고실험"을 해 보았는데,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고실험 : 저렴한 배경 지우개로서의 필름카메라 - 135, 645, 69포맷


 가정 : 당신은 "반신 세로샷"을 찍는다. 화면에 담는 반신의 길이를 0.8m로 잡고 머리 위 공간을 0.4m를 남긴다면 화면에 들어갈 높이는 1.2m다.

 조건 : 카메라 모델이 바뀌면서 화각이 바뀔 수 있는데, 피사체와의 거리를 변경하면서 위의 가정을 충족하게 한다.


 실험 내용 : "반신 세로샷"을 찍으면서 1m 뒤에 있는 물체와 ∞ 뒤에 있는 물체의 "배경 흐림" 정도를 계산한다.[각주:7]


 카메라 1 : 135포맷, 50mm F/1.8 (상당수의 저렴한 필카가 이 조건을 충족할 것이다)

 인물과의 거리 : 1.67m

 1m 후경 : 렌즈 블러 11.5 pixel @ H=1280px[각주:8]

 ∞ 후경 : 렌즈 블러 30 pixel @ H=1280px[각주:9]


 카메라 2 : 후지필름 GA645 (645포맷, 60mm F/4)

 인물과의 거리 : 1.06m

 1m 후경 : 렌즈 블러 10 pixel @ H=1280px[각주:10]

 ∞ 후경 : 렌즈 블러 20.5 pixel @ H=1280px


 카메라 3 : 후지필름 GW 690 III (69포맷, 90mm F/3.5)

 인물과의 거리 : 1.2m

 1m 후경 : 렌즈 블러 13.5 pixel

 ∞ 후경 : 렌즈 블러 29.5 pixel


 135포맷 환산화각은 GA645와 GW 690 III쪽이 좀 더 넓어서, 준광각으로 볼 수 있다. (각각 37.5mm와 39mm다)




 중형 필름카메라의 환산화각을 50mm로 맞추지 않은 이유는 가격과 휴대성을 고려한 결과이다. 무리를 해서 마미야 645에 80mm F/2.8를 장착해도 배경흐림 정도는 135포맷의 50mm F/1.8을 다소 상회하는 수준이다[각주:11]. 가격과 무게를 생각할 때 단지 "배경을 지우겠다는 이유만으로" 마미야 645를 구매한다는 것은 좋은 선택이라고 하기 어렵다.


 135포맷에서 판형이 더 작아져도(APS-C, 포서드, CX…) 단렌즈 제품들은 크게 밝아지지 않았다. 표준화각에서 F/1.4를, 이에 근접한 표준영역에서 F/2.8을 맴돌았을 뿐이다. 이 때문에 135포맷까지는 심도를 얕게 하기 위해 큰 판형의 카메라를 구입하는 게 괜찮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135포맷에서 중형으로 커지면 판형이 커진 만큼 렌즈의 밝기도 떨어지는 편이다. 따라서 135포맷부터는 더 큰 판형의 카메라를 구입해도 심도는 사실상 얕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중형 필름카메라의 큰 판형은 깊은 심도를 확보해야 할 때 걸림돌이 되며(중형에서 심도 좀 확보하려면 F/22쯤 조이는 건 예사다) 최대개방값이 적어 저광량 상황에서 셔터속도를 확보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F/3.5는 F/1.7보다 두 스탑 정도 어둡다. 135포맷에 ISO 200 필름을 끼웠다면 대략 형광등 밝기의 실내에서 F/1.7에 1/30초 정도가 나오며, RF카메라로는 간신히 핸드블러 없이 찍을 수준이 된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F/3.5로 1/30초를 확보하려면 ISO 800 필름을 끼워야 한다. 중형 컬러필름으로 ISO 800이면… 선택의 여지도 없고 가격도 오른다.


 그러니까 배경을 흐리게 만들고 싶다면 중형 기웃거리지 말고 135포맷에 밝은 단렌즈를 쓰자. 이런 글을 맨 처음 포스팅한 이유는… 기억력이 안 좋은 내가 혹시라도 나중에 또 중형을 기웃거리게 될까봐서다.




 각주


  1. QL17은 상당히 가격대비 성능이 좋은 필름카메라이다. 필름 장전이 어렵지 않고, 노출계가 붙어 있으며,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매물을 구하기 쉽다. 값싼 클래식 카메라에 한동안 관심을 두다 보면 이 "지극히 당연한 사항들"이 적용되지 않는 물건이 의외로 많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본문으로]
  2. 2012년 11월 기준, 서울시청 근처의 "스튜디오 인". [본문으로]
  3. 36컷 1롤에 4천원이라고 가정했다. 값싼 필름을 대량으로 구매하면 이 비용은 더 낮출 수 있다. [본문으로]
  4. 120포맷 한 롤에 6000원으로 가정하였다. [본문으로]
  5. 120포맷 한 롤로 16컷 촬영할 수 있다. [본문으로]
  6. 120포맷 한 롤로 8컷 촬영할 수 있다. [본문으로]
  7. 이 계산에는 CoC(착란원)의 개념이 쓰였다. [본문으로]
  8. 카메라에서 먼 쪽의 피사계심도가 2.67m(카메라 1의 인물과의 거리 1.67m에, 인물과 배경의 거리 1m를 더한 값이다)까지 확보되는 CoC를 계산해, 이 CoC와 필름면의 긴 쪽 길이(세로샷의 높이)의 비율을 1280pixel 높이의 이미지에서 차지하는 pixel의 값으로 환산한 것이다. 즉, 높이가 1280pixel인 사진을 포토샵에서 "블러"처리하고 그 값에 이 pixel값을 넣으면 흐려지는 정도가, 실제 촬영을 하였을 때 1m 뒤에 있는 배경이 흐려지는 정도와 유사하다. "카메라에서 먼 쪽의 피사계심도"는 dofmaster 사이트의 On-Line Depth of Field Calculator에서 볼 수 있는 "Far Limit"의 값과 같다. [본문으로]
  9. 카메라 1의 조건 50mm F/1.8에서, Hyperfocal Distance가 1.67m(인물과의 거리 조건)이 되는 CoC를 계산하고, 이 CoC와 필름면의 긴 쪽 길이(세로샷의 높이)의 비율을 1280pixel 높이의 이미지에서 차지하는 pixel의 값으로 환산한 것이다. 즉, 높이가 1280pixel인 사진을 포토샵에서 "블러"처리하고 그 값에 이 pixel값을 넣으면 흐려지는 정도가, 실제 촬영을 하였을 때 무한대 거리만큼 떨어진 배경이 흐려지는 정도와 유사하다. [본문으로]
  10. 이 값은 카메라 2의 촬영 상황에 맞게 조정하여 다시 계산한 것이다. [본문으로]
  11. 인물과의 거리 1.71m, 1m 후경 렌즈 블러 12px, ∞ 후경 렌즈 블러 32px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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